*** 1. 기분 좋은 주말 아침은 온갖 매체에서 역대급 추위가 몰아칠 거라고 으름장을 놓았던 것에 비해 포근한 날씨였다. 온 방의 창문을 꼭꼭 닫고 뽁뽁이까지 붙여 둔 보통 한국인의 아침에 연은 뜨끈한 전기장판에 몸을 지지며 잔뜩 웅크렸던 몸을 일으켜 기지개를 켰다. 마른 몸이 고양이처럼 늘어나면 우드득, 우득, 하고 뼈가 제자리를 찾는 소리가 난다. 하...
*** 적막한 방안에 주홍빛 물결이 일렁거렸다. 얇은 눈꺼풀을 벌린 연은 자연스럽게 네모진 창을 눈에 담는다. 노을이 졌다. 지난 며칠간 곁을 채웠던 온기는 온데 간데 없어, 마치 그것을 대신하려 하는 듯이 벽과 천장을 물들이는 빛이었다. 연은 마른 손으로 제 곁을 더듬는다. 그가 앉았던 의자를 바라본다. 저 답지 않은 행동에 웃음을 흘렸다. 천천히 상체를...
*** 해준은 연의 손을 잡아끌었다. 검은 문의 방에 들어갔을 때와는 반대되는 행동이었다. 비스듬한 뒷모습을 보면 짜증이 난 것 같은데, 그 이유야 뻔했으니 연은 태연하게 모르는 척을 했다. 어차피 벌어진 일인데 무얼 어떻게 하겠는가. 명백한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니 그에게는 사과라는 선택지도 존재하지 않았다. 게다가 함께한 덕분에 네 송이나 되는 꽃을 ...
*** 난간을 붙들고 천천히 계단을 오르던 연은 결국 층계참에서 멈춰 섰다. 끄응. 연은 겨우 삼켰던 앓는 소리를 흘리며 표정을 일그러뜨리더니 느린 숨을 내쉬었다. 엄살이라고 하기엔 인생에서 최초로 자리한 커다란 부상은 코트까지 입었으나 움직일 때마다 붉은 자욱을 일렁거리게 만들었다. 하아... 연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그가 얌전히 방을 나서주어서 다...
*** 발 디딜 곳 잃은 연은 생각했다. 아, 정말로 죽을지도 모르겠다. 어딘가 붕 떠 있는 저택 속 세계는 현실감이 없어 꿈이니 환상이니, 아니면 어떤 영화나 드라마처럼 다 같이 사고를 당해 혼수상태에 빠졌다던가 하는 허무맹랑한 상상까지도 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연은 이성적인 사람이었고, 그렇기에 가장 가능성 있는 두 가지 가설만을 남겼다. 정말로 꿈이거...
*** 꽉 다물린 꽃봉오리 사이에서 화사함을 자랑하는 유일하게 만개한 꽃처럼, 연은 널따란 로비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날카로운 녹색의 시선은 실제보다 더 실제 같은 그림 속 화단을 가만히 응시한다. 연은 저택 지하 탐방을 마친 이후부터 내내 남자의 말을 곱씹었다. 영원히 갇히다. 미술관. 친구였던 이들. 통째로 기억하지 못했으나 토막 난 주요 문장들이 머...
윤해준[비행]181208 해준이 고민했다. 역시 잘 못 온게 아닐까. 고작 전시였을 뿐인데 이상한 일들이 연속적으로 일어나고 영화에서 볼수 있을법한 상황들이 줄을 지었다. 손에 들려진 작은 액자도 비현실의 일부다. 이쯤 되니 호접지몽인가 싶어 뺨을 몇대 때리는 것으로도 깨지 않을 것 같다. 한숨이 절로 나왔다. 현실과 거짓을 구분해내지 못하고 있다. 아니면...
*** 진입에 실패했던 창고를 다시 찾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날, 문 따기를 포기했던 창고에서 불길이 치솟았고, 내용물까지 다 타버렸을지도 모르나 열리지 않는 문도 없을 테니 빈터로나마 호기심을 충족시키러 가보기로 한 것이다. 물론 쫓기고 뛰어다니느라 바로 실행할 수는 없었다. 여전히 괴이는 많았고 몇 번 죽을 뻔했음에도 그는 천성을 이길 ...
*** 알 수 없는 공간을 빠져나온 직후부터, 연은 발길 닿는 대로 저택을 들쑤시고 다니며 호기심을 충족시켰다. 시작과 달라진 점이 있다면 마른 품 한 가득 새하얀 토끼 인형을 안고 있다는 것으로, 모르는 사람이 보았다면 귀여운 걸 좋아하는 사람이라거나 아니면 누군가에게 선물을 준다거나, 혹은 이벤트를 꾸미는 중이구나 따위의 상상을 하며 훈훈한 미소를 지었...
*** 끝나지 않는 어둠을 무작정 걸으면서도 연은 생각을 멈추지 않았다. 아직까지 쓸만한 단서를 손에 넣지 못했기에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공간의 구성을 파악하는 생각뿐이었지만 계속해서 머리를 쓰는 게 훨씬 마음이 편했다. 처음에는 무채색 속에서 자신을 제외하고 색을 가진 두 장의 그림을 관찰하였고, 그다음은 벽과 타일, 천장을 보며 걸었다. 서른네 바퀴를 ...
*** 끝을 알 수 없는 공간 한가운데에서 연은 무언가 생각난 듯이 휴대폰을 꺼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지? 몇 번이고 지나친 그림 속 하늘에선 부드러운 오후 햇살이 내리쬐고 있었으나 그의 의문을 해소하는 데에 도움은 되지 않았다. 자연광이 비치지 않는 복도에서 오래 헤매기는 했지만 그렇게까지 시간이 지났을 것 같지 않았고, 지나칠 때마다 곁눈질한 그림 속...
*** "저기, 무슨 든든한 빽이라도 있어요? 아니면 돈이라도 많으신가? 내 상식으론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서 물어보는데, 정말 그런 이유 하나도 없이 담홍이가 아직도 그쪽을 좋아할 거라고 믿는 거예요?" 화사한 귀갓길에 시작된 불청객과의 만남은 싸늘하게 가라앉은 공기 덕분에 군데군데 살얼음이 끼어 있었다. 차가운 온도가 애정에 담뿍 절여져 부드럽게 풀렸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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